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사랑은 원래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고귀한 것이 ‘사랑’ 이지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하고 삽니다. 사랑을 빼고는 아무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곡된 사랑, 변질된 사랑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폭력이 난무하고, 잘못된 자기 사랑 때문에 비극이 일어납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닙니다. 집착도 아니구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2020년을 시작하면서 ‘회복’이라는 단어를 말씀 드렸습니다. 가정의 회복은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으면 수많은 관계들이 회복의 기지개를 켤 것입니다.

이 사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사랑이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허물이 대단히 많았던 인물이지요. 그토록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옛 바닷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랬던 그를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사랑으로 덮어주셨지요.

 

사랑은 허물을 들추어 내거나 따지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지요.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모습으로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다른 형제들에게 고자질합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가지를 어깨에 걸치고 뒤돌아서서 들어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 세 아들의 후손들에게 어떤 축복과 저주가 임하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정교한 신학적인 해석과 접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허물이나 실수를 본 것이지요. 이에 대한 반응은 축복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들추어 내고 폭로하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사랑으로 덮어주고, 안타까움으로 기도해줄 수 있으면 어떨까요? 마지막 시대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한국을 일컬어 ‘분노가 일상화’된 사회라고 하더군요. 익명이 보장된 사이버 세상은 화난 감정의 배설물 처리장이 된지 오래입니다. 이런 점에서 셈과 야벳의 뒷모습이 더욱 귀하게 보일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올 해 가장 가까운, 그래서 허물도 많이 볼 수 밖에 없는 가족을 사랑으로 덮어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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